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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4일

형통하게 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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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통하게 하시는 하나님”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어릴 때 어머니 손잡고 교회에 가면 수요일 저녁예배 시간마다 부르던 찬송가 가사이다. 형통(亨通)이라는 말 자체가 주는 어감대로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삶의 시간마다 번영과 만족을 누리는 상황이 주어지는가? 성도의 현실을 직시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흔하게 발견되곤 한다. 하나님의 약속이 거짓인가? 우리의 믿음에 문제가 있는가?

구약 성경에 68회나 인용되어 있는 ‘형통’이라는 단어는 흔히 ‘좋은 일’, ‘복된 일’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에게 ‘좋고 복된 일’은 무엇일까? 창세 전에 예정하신 창조주의 뜻이 피조물에게 담겨지고 열매 맺는 것보다 더 가치 있고 중요한 일이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선행되어야만 비로소 성도는 ‘형통’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한 인간을 ‘인간’되게 하시며 성도의 현실에 ‘자녀의 영광’을 심어가시는 과정, 그 모든 시간과 공간을 통해 태초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회복되는 일련의 모든 굴곡을 성경은 ‘형통’으로 표현하며 그 길의 끝에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한 공동체의 회복을 발견하게 된다.

성경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형통’을 보여주는 한 사람을 꼽자면 바로 ‘요셉’이다. 편애하는 아버지 ‘야곱’의 손에 자라면서 형들에게 미움 받고, 결국 친형제의 손에 노예로 팔려간다. 노예의 현실에서 그 인생의 나락은 멈추지 않고 주인의 아내를 강간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범죄자가 되어 감옥에 갇힌다. 언제 자유의 몸이 될지, 언제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어떠한 기약도 없이 답답한 시간을 지나는 요셉의 인생을 향해 성경은 ‘형통’하다고 설명한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창세기 39:2)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창세기 39:23)

뭐 이런 형통이 있단 말인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자의 삶에 나타난 형통은 요셉의 삶을 노예에서 자유롭게 하지 못했다. 물론 감옥에서 꺼내놓는 형통도 아니었다. 형통해서 노예로 팔려가고, 형통해서 감옥에 갇혀 있는 요셉. 그의 인생에 나타난 형통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해할 수 없고 감당하기 어려운 요셉의 현실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좋고 복된 일’을 이루신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좋고 복된 계획이 요셉의 삶을 통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모세가 이집트에서 30살 이상의 남자만 60만에 이르는(약 200만명으로 추정되는) 인구를 이끌어내기까지 하나님은 약 400년 만에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약속을 이루신다. 요셉이 총리로 있을 당시에 7년의 풍년 후에 닥치는 7년의 흉년 기간에 이집트 인근의 모든 나라들이 그로 인하여 흉년의 고통을 벗어난다. 가장 놀랍게는 요셉을 미워하여 자신들의 친동생을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조차도 요셉을 통해 기근의 위협을 벗어나고 당대 최강의 국가인 이집트에 특혜를 받고 정착하게 된다.

요셉의 삶에 나타난 ‘형통’은 그 과정, 순간순간을 보면 도무지 형통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모습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이 지나 인생의 의미가 깨달아질 때가 되면 한 인생의 굽이굽이마다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고 섭리하셔서 우리가 다 통찰할 수 없는 큰 그림을 가지고(이를 역사(歷史)라고 한다.) 그 일의 결국에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어내시는 능력을 보게 된다. 형제 사이에서 발견되는 미움과 원망, 역설적이게도 그 부정적 요인을 통해 요셉의 삶을 높이 드시며 그를 노예로 팔아넘긴 형제들을 비롯한 인근 국가의 모든 이들이 복을 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성경은 형통(亨通)이라고 표현한다.

오늘 나와 당신의 삶에 경험되는 모든 한계와 부정적 요인들, 이미 저질러버린 부끄러운 기억과 엎질러진 물 같은 상황들, 하나님은 이 모든 것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형통’을 이루신다. 그리고 우리의 형통을 통해 우리 주변에 있는 이들도 결국 하나님의 ‘좋고 복된 일’에 들어오게 하신다. 무지한 죄인들을 통해 이 놀라운 형통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놀랍지 않은가?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보다 크시며 지혜로우시다.

십대교회 박준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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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마태복음 3:16-4:1)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 앞에 나와 스스로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놀라운 음성이 들린 후에, 성부 하나님의 사랑하고 기뻐하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맞은 현실은 광야였다. '광야'로 번역되어 있는 '에르몬'이라는 단어는 형용사로 쓰일 때 '쓸쓸한, 적막한, 황량한' 등의 뜻을 가진 단어에 관사를 붙여 사용하는 명사이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는 때에 왜 그분은 광야에 이끌리셨는가? 어떤 인생도 원치 않는 쓸쓸하고 적막하고 황량한 환경에 예수를 "몰아내신"(마가복음 1:12)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은 무엇을 위함인가? 로마서 5장 1-4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은혜에 들어'가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성도의 현실을 '환난'으로 규정한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5:3-4) 영어 성경을 보면 그 의미가 더 명확해진다. "Not only so, but we also rejoice in our sufferings, because we know that suffering produces perseverance; perseverance, character; and character, hope." 영어 구문에서 "Not only A but also B" 라는 표현은 A보다 뒤에 나오는 B를 더 강조하는 관용적 표현이다. 즉, 1-2절에 나오는 그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상태보다 성도가 경험하고 기뻐하는 현실은 '환난', '고통'이라는 표현이다. 어떤 의미에서 환난과 고통인가? 각자가 바라는 상태가 유지되지 않고 오히려 기대하지 않았던, 아니, 적극적으로 피하고 싶었던 상황 속에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로서의 고통이다. 하나님은 왜 그분 자신이 사랑하고 독생자 예수의 생명을 주시면서까지 구원해내신 성도의 삶에 고통을 주시는가? 고통의 의미는 무엇인가? 시편 기자는 119편 71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어려움을 당한 성도는 그 삶의 자리에서 비로소 생각을 시작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나름 노력하고 있는 내게 왜 이러한 어려움이 있는가? 내가 잘못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나를 주목하지 않고 계신가? 틀린 질문이다. 피조물을 만드신 창조주는 인간을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그 자녀의 가치를 각 인생에 구체적으로 담아가신다. 나무가 자라듯이, 생명이 자라나듯이 모든 시간과 환경을 통해 구체적으로 담아내신다. 단순히 맞으면 그만이고 틀리면 다시 풀어야 하는 수학 문제와 같이 스스로의 인생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채점자와 같이 여긴다면 그처럼 잘못된 인식이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잘못된 판단과 실패하는 시간을 허락하신다. 그 시간을 지나 스스로 생각하여 자발적으로 하나님 뜻의 위대함과 가치를 발견하기 원하신다. 인생이 만드는 최선이라는 것이 얼마나 의미 없고 악하고 부끄러운지 깨닫는 시간을 맞이하게 하신다. 청소년, 청년 때는 아무리 "노력"해도 알 수 없는 깊이와 의미를 담아가게 하신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노력과 의지가 인생이라는 가치를 담기에 충분치 않다는 것을 인식한다. 사랑해서 결혼한 아내와 남편을 사랑해내지 못하는 자신의 "의지"를 발견한다. 자식을 바르고 지혜롭게 양육하기 위해 스스로 했던 모든 "노력"이 얼마나 기대와는 다른, 허망한 결론으로 치닫는지를 보게 된다. 내게 있는 무엇을 잘 사용하고 창조주의 뜻을 적당히 빌려내어 살아가기에는 인생이 얼마나 크고 복잡한 지를, 창조주의 지혜와 경륜이라는 것이 도무지 인생의 지혜와 경험으로는 측량조차 못할 위대함인지를 보고 스스로 항복하는 시간을 갖는다. 성도는 이 시간을 언제 맞이하는가? 이미 경험했다고, 안다고 주장했던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감당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문제, 환난, 고통, 실패 속에서 성도는 그제야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서게 된다. 영국의 평론가 C.S.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라는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고통의 유익은, 고난 받는 당사자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게 되며, 그의 고난을 목격한 사람들은 동정심을 품고 자비로운 행동을 하게 된다.’ 성도인 우리 모두는 종이 아닌 자녀의 신분으로 예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 앞에 서있는 자들이다. 자녀의 삶에 담겨지는 이해와 가치와 유익을 담아가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은 그 사랑 속에서 동시에 좌절과 고통, 문제와 환난을 허락하신다. 그 역기능적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시며 우리는 그 사랑 안에 자라간다는 것을 시간을 지나 알게 하심으로 부인할 수 없는 신앙의 흔적을 갖게 하신다. 그 시간을 잠잠히 지나는 이들은 더이상 스스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소리치며 고집하지 않을 것이며 타인의 고통과 문제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자리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환난 중에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묵묵히 동행하는 성도의 연합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녀로 자라나는 영광을 비추는 빛으로 심겨진 자리를 살아간다. 그 넉넉함은 환난 속에서도, 언제나 가능하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고린도후서 1:3-4) 십대교회 박준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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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7월 4일

    뉴스를 보면 하루도 빠짐 없이 들려오는 소식이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회 소외층에 속한 이들이 기본적인 원칙과 보호조차 받지 못한 채로 자본의 소모품이 되어 죽어간 소식이 끊임없이 들려온다. 사회 유명인사들의 죽음 소식 역시 종종 듣게 된다. 몇집 건너 이웃의 죽음을 보게 되고 그다지 멀지 않은 지인이 죽을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그런 죽음의 소식은 우리에게 별다른 마음의 진동을 주지 않는다. 왜 그런가? 사랑하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 좁혀서 얘기하자면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과 나의 삶이 어디쯤에서 연결되어 있는지, 그 지점을 도무지 찾을 수 없을 때 인생이 겪는 가장 큰 고통인 죽음조차도 우리에게 의미를 갖지 못한다. 사랑하는 이의 감기나 고열에도 우리는 음식과 약으로 도움을 주려 한다. 이웃이 굶고 지내는 것보다 남편이나 연인의 사업 부진이 더 큰 문제이다. 상황은 객관화 되지 않는다. 언제나 그 상황을 보고 받는 이의 관점으로 주관화되어 인식된다. 이것은 인간 관계의 비극인 동시에 또한 성도에게 있어 마지막 위로이자 희망이기도 하다. 나의 상황에 뛰어드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과 인식은 늘 이 작은 인생에 독생자 예수를 던지신 사랑으로 주관화 되어 작동하기 때문이다. 나를 보아달라고 아무리 소리치고 애원해도 사람들에게 그 위로와 사랑을 경험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만 그분은 나의 작은 신음에 응답하시기 때문이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이사야 2:22)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브리서 4:15) 성경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신다고 기록한다. 영어 단어로는 'sympathy'로 표현되어 있다. 이는 헬라어 'sym'과 'pathos'의 합성어이다. "함께 고통당하다"라는 의미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성경은 함께 고통당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드러내고 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삶을 관조하지 않으신다. 마치 욥의 삶에 폭풍우와 함께 뛰어들어 개입하시듯이 그분은 우리의 삶에 개입하고 함께 하신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욥기 38:1) 사랑하면 공감하지 않을 수 없고 함께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아프면 내가 더 아프고 그가 죽어가면 어떻게든 살리려 하고 마지막을 지키려 한다. 자신들의 죄악에 스스로 망해가는 인류의 마지막에 독생자 예수는 십자가를 지고 뛰어들어 오셨다. 그 사랑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랑하는 피조물의 삶에 함께 함으로 증명되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6-8)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이 외롭고 고단한 시간을 지날 때 충분하고 괜찮다고 말하는 믿음은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버겁다. 심지어 선지자 엘리야조차도 갈멜산의 그 위대한 영적 전투의 승리 후에 이세벨의 말 한 마디에 마음을 놓치고 그 인생의 외로움과 두려움을 하나님 앞에 토로한다. 죽음을 앞에 둔 선지자의 고백에서 우리는 인생이 갖는 본질적인 약함과 고독함을 본다.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열왕기상 19:10) '오직 나만 남았거늘'이라고 신음하듯이 기도를 뱉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왜 믿음이 없냐고 질책하지 않으셨다. 만군의 여호와가 함께 있으면 충분하지 않냐고 강요하지도 않으셨다. 오히려 먹이고 쉬게 하시며 그와 함께 하는 이들이 있음을 엘리야에게 알게 하신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열왕기상 19:18) 인생을 홀로 두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함께 하는 이들을 두시고 그들과 함께 사랑과 공감을, 신뢰를 나누게 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함께 있음으로 증명되었고,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이들은 그 자체로 사랑을 드러내고 있다. 고통당하는 이들과, 마음과 육신의 질병으로 죽어가는 이들과 우리가 나누는 사랑은 함께 울고 함께 하는 것, 그것으로 표현된다. 십대교회 박준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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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7월 4일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길에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시편 119:37) 구원의 기쁨이, 성도의 삶이, 주어진 위치와 역할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사라질 때, 하루를 어떻게 지나가야 하는지 막막할 때, 하늘 아버지께 우리가 구해야 하는 한 가지 내용이 있습니다. 허탄한 (공허한/허무한/욕망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삶) 것을 보지 않도록 내 눈을 지켜달라는 겸손한 고백입니다. 한 인격을 선택하셔서 그리스도 닮은 자리까지 이끌고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길고 위대합니다. 감히 우리가 이해하고 스스로 담아낼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길게 뻗어있는 고속도로를 달릴 때 이정표를 보지 않으면 어디를 가는지 모르지만, 분명한 사실은 목적지에 가까워지는 어딘가를 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인지하지 못해도, 이 못난 시간을 통해, 모든 순종과 불순종을 들어 당신의 자녀됨의 영광을 아는 자리로 이끌고 계십니다. 탕자의 폐역과 허랑방탕함을 통해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아들을 만드셨듯이 말입니다. (누가복음 15장) 잘 해야 하는 싸움이 아닙니다. 잘나야 하는 싸움이 아닙니다. 외롭지 않고 아프지 않아야 하는 싸움이 아닙니다. 못나고, 못하고, 외롭고, 아파도, 더듬거리고 기어서라도 가야하는 믿음의 여정 어딘가를 걸으면서 앞을 보지 않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면 모든 허탄한 것들로부터 눈을 돌이켜 달라고 겸손히 구할 일입니다. 홀로 두시지 않겠다 약속 하셨습니다. 믿음의 허다한 증인들을 주시겠다 약속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2:1) 회복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하는 부끄러운 현실을 만나셨다면 눈을 돌이켜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함께 회복되어가는 성도의 연합으로, 서로에게 진실되고 정성되게 격려하고 섬기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길에서 살아나는 자신을 다시 경험하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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